시민공감 기자단 기사

김우영 그리고 양한나의 관사촌 人 이야기

시민기자단_최병성

김우영 그리고 양한나의 관사촌 人 이야기1

2022 테미오래 하반기 기획전으로 테미오래에서 거주하였던 김우영과 그의 마지막 부인 양한나를 통해 알아보는 근현대 시대상과 그 시대에 함께 살았던 신여성에 관한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근현대사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곳에서 거주하였던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로 다양한 삶의 양식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였습니다.

김우영 그리고 양한나의 관사촌 人 이야기2

실제 1940년 충청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 사무관으로 3년 동안 이곳 관사촌에 거주하였던 김우영을 기준으로 상반기에는 그의 두 번째 부인 나혜석의 기획전시가 있었고, 하반기에는 그의 마지막 부인 양한나의 기획전시가 있었습니다.
김우영은 총 4명의 부인과 함께 살았는데, 첫 번째 부인은 조혼풍습이 만연했던 1905년 개양학교 졸업 직후 19세 동래의 포목상 김원로의 장녀 김 씨였습니다. 1919년 첫 부인이었던 김 씨의 사망 이후 만나게 된 두 번째 부인이 시대를 앞서나간 신여성 나혜석이였으며, 1930년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으로 인하여 이혼한 김우영은 이후 곧바로 거창 출신의 동래 기생이었던 신정숙을 만나 세 번째 결혼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신정숙과 그리 오랜 인연을 갖지 못하고 김우영은 이내 마지막 부인인 양한나와 1937년 결혼하였습니다.

김우영 그리고 양한나의 관사촌 人 이야기3

양한나는 이화여자전문 유치사범과에 입학하여 1925년 예과를 졸업하였다. 학교 졸업 후 정동 이화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활동하던 양한나는 1926년 7월 17일 당시 조선 여성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1930년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양한나는 20년대의 종횡무진으로 활동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는 어느 한 영역의 전문가로서 주로 기독교 활동과 유치원 운영을 중심으로 집중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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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양한나의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소원했기에 양한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5계명을 지켜 아버지께 순종하겠다.”는 결심으로 김우영과 결혼하여 약 20여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이 점에서 양한나의 조카 우창웅 씨는 “양한나와 친일파 김우영과의 결혼은 안창호, 김규식 등이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이용하기 위해 그녀를 설득한 결과이며 1958년 김우영이 사망하기까지 두 사람은 정상적인 결혼 관계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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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양한나는 항일 의식은 의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15년 일본 천황 오시히토의 즉위 기념 떡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먹이려 하자, 양한나가 분개하였고 학생들이 이에 동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양한나는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었고,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유로 더 이상 교단에 머무르기 어려워지자 1917년 일본 요코하마 신학대학으로 떠나게 되었으나 일본에서도 학교 공부 이외에 사회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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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성 최초 경찰서장이 되었던 양한나는 1946년 6월 미군정 시기 수도청장 장택상의 권유로 제1기 여자 경찰 간부로 임용되어 1947년 3월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에 취임하여 최초의 여자경찰서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5월경 의원면직하며, 짧고 굵게 수도 여자경찰서 역사에 획을 그었습니다. 당시 독립촉성부인단장이었던 양한나를 비롯한 애국 부인 운동의 선구 여성들로 채워진 여자경찰청은 여자 경찰관의 지도와 여자에 대한 범죄예방, 풍기의 선도 등에 이바지하고자 창설되었습니다. 당시 민간단체들은 공창 폐지 운동에 매진하고 있었고, 경찰서장으로 임명된 양한나 역시 공창 폐지를 진두지휘하면서 소외된 여성들에게 크게 관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또한, 길거리를 방황하는 여성정신질환자들을 보는 대로 그의 집으로 데려와 보살핀 양한나는 이들이 대부분 돌아갈 곳이 없는 무의탁자가였기에 함께 살기 위해 자매여숙 입구에 해피하우스란 간판을 단 2층집을 두었고, 약 4천명 가까운 고아와 질환자를 거둬낸 양한나는 67년 용신봉사상, 76년 국민훈장 동백상 등 많은 표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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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심(테미오래)에서 일어난 옛 시대의 시대상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김우영과 양한나의 기획전을 통해서 당시의 삶을 알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원도심에서 일어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많이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