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공감 기자단 기사
시민기자단_고혜정
골짜기 물이 온 들판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흘러가는데
이 냇물 이름이 ‘갑천’이다.
갑천 동쪽은 회덕현이고 서쪽은 유성촌과 진잠현이다.
사방을 산으로 막아 들판 가운데를 둘러쌌는데
평평한 둔덕이 뱀처럼 뻗었고
아름다운 산기슭이 맑고도 빼어났다.
강경이 멀지 않고 앞에 큰 시장이 있어
해협의 이로운 점도 있으니
대를 이어 영원히 살 만한 곳이다.
- [택리지(1751)], 이중환 -
국사 시간에 배웠던 [택리지]를 기억하시나요? 1751년(영조 27) 실학자 이중환이 저술한 우리나라 지리서입니다. 조선 팔도를 돌아다닌 후 각 지역의 특성과 자연환경을 기록한 이 책에서 갑천유역은 ‘대를 이어 영원히 살 만한 곳’이라 합니다. 이중환이 말한 갑천유역이 어디일까요? 바로 갑천, 유등천, 대전천이 흐르는 오늘날의 대전지역입니다.
4대 문명에서 볼 수 있듯 예로부터 사람들은 물가에 모여 살며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왔습니다. 대전 역시 강변을 따라 구석기부터 청동기까지 모든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걸 보아, 적어도 10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갑천, 유등천, 대전천 그리고 이들이 모인 금강까지 4곳의 국가하천부터 대사천, 유성천, 법동천, 용호천 등 26곳의 지방하천과 금곡천, 세동천, 산디천, 알미천 등 87곳의 소하천까지 116개의 크고 작은 하천이 흐르는 대전. 대전하면 ‘과학의 도시’, ‘교통의 중심지’라고들 하지만 이 정도면 ‘물의 도시’라는 별명도 걸맞습니다.
엑스포과학공원 근처 갑천 전경
올여름, 이들 3대 하천이 간직한 생태, 역사, 문화 자원을 발굴하여 탐방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이 연구는 우리나라 수자원의 종합적 이용과 개발 업무를 맡은 한국수자원공사가 주최합니다.
그동안 국토교통부 산하기관으로서 하천의 수량과 수질 관리에 주력했다면 2018년 환경부 소관으로 바뀌면서 하천이 만들어낸 역사와 문화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국수자원공사가 자리한 대전에서 <갑천유역 생태·문화 탐방프로그램 개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연구에는 하천의 자원을 상품화할 참여기관과 전문가그룹, 시민자문단까지 25명이 함께하며 7월부터 한창 진행 중입니다.
7월 마지막 주에는 3대 하천 공동답사에 나섰습니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폭염이었지만 대전시민도 몰랐던 숨은 보석 같은 명소와 이야기를 만날 생각에 즐겁고 유쾌하게 다녀왔습니다.
400년 된 증촌꽃마을 느티나무 보호수
첫날에는 대전을 흐르는 가장 큰 줄기라 우두머리 하천으로 불리는 갑천으로 향했습니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 깊은 산골에서 시작하는 갑천변에는 엑스포과학공원, 국립중앙과학관, 엑스포다리, 유림공원, 선사유적지 등 대전하면 떠오르는 명소들이 모여 있습니다. 노루벌, 월평습지, 탑립돌보 등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장군약수터에서 출발한 작은 물길은 용촌동 미리미마을과 정뱅이마을을 지나 증촌꽃마을과 야실마을로 이어집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팽나무 못지않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서 증촌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전국 5대 광역시 중 하나인 이곳에, 인간형 로봇 ‘휴보’와 달 탐사선 ‘다누리’가 태어난 최첨단 과학도시에 이런 농촌이 있다니 놀라웠습니다. 대둔산 물과 계룡산 물이 만나는 두물머리에는 야실마을이 있습니다. 바쁜 도시인들에게 평안함을 안기는 시골 풍경을 실컷 감상했다면 이제 어둠이 내려앉길 기다려야 합니다.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밤하늘에서는 수많은 별을, 지상에서는 반딧불이를 감상할 수 있답니다.
노지 캠핑장과 반딧불이 서식지로 유명한 노루벌과 전국 최고의 철새 탐조대인 탑립돌보까지, 굽이치며 흐르는 갑천은 사람들과 동식물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합니다.
안영교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유등천
둘째 날 옛 충남도청 앞에서 만나 유등천과 대전천을 답사했습니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월봉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유등천은 대전의 깃대종 중 하나인 감돌고기의 서식처입니다. 감돌고기는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종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된 물고기입니다. 2급수 이상의 맑고 깨끗한 물을 좋아한다니, 유등천의 수질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유등천의 첫 번째 다리인 수련교 인근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고 안영교 인근에는 왕버들이 반겨줍니다.
조선시대 지리지부터 유등천 이름에는 언제나 ‘버들 유(柳)’가 들어있습니다. 강변 따라 버드나무가 얼마나 많았으면 버드나무 하천, 곧 유등천으로 불렸을까요. 바람결에 부드럽게 넘실대는 버드나무처럼 유등천 주변은 평안함이 깃들어 있고 유회당, 창계충절사, 도산서원 등 조선시대 선비문화가 남아있습니다.
대전천 발원지인 봉수레미골
동구 하소동 만인산, 산세가 수려하고 경치가 아름다운데다 천하의 명당이라 하여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태를 묻은 곳입니다. 덕분에 나라의 봉산으로 지정되어 예로부터 잘 보존되어 왔습니다. 이곳 동쪽 계곡에는 경기와 호남에 긴급한 소식을 알리거나 큰 제향이 있을 때 봉화를 올렸던 봉수레미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대전천의 발원지입니다. ‘만 길이나 높거나 깊은 산’이라는 이름처럼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숲을 간직한 만인산은 한여름에도 산책하기 좋은 곳입니다. 정훈 시인의 대표작 ‘머들령’을 감상하고 꿀 호떡, 어묵, 가래떡 등 간식 3종 세트를 맛볼 수 있어 대전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석교동에는 1982년에 건립된 대전천 유래비가 있습니다. 예전에 돌다리가 있어 마을 이름도 석교동이 된 이곳에는 비학산과 알바위의 전설도 전해집니다.
3대 하천 중 유일하게 대전에서 발원하며 이름부터 대전인 이 하천은 대전의 근현대사와 함께했습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원도심의 부침을 지켜본 대전천은 만세로 광장 곁을 지나갑니다. 1919년 3월 16일,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대한독립만세 운동의 불길이 마침내 대전에 도착했고 일제 탄압에 분노한 사람들은 인동시장에서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인동시장 맞은편 태극기가 펄럭이는 데크 길에는 3·16 인동장터 만세기념비와 평화의 소녀상, 강제 징용 노동자상이 그날을 소환합니다.
갑천유역 생태·문화 탐방프로그램 워크숍 현장
<갑천유역 생태·문화 탐방프로그램 개발 연구>는 현장답사 경험을 바탕으로 8월 3일에는 탐방 프로그램 아이디어 발굴 워크숍을 개최했습니다. 1부 전문가 특강 시간에는 '강 문화의 가치와 지속가능한 접근'이라는 주제로 원광대학교 안병철 교수가, '최신 관광 트렌드와 사례'라는 주제로 한국관광개발연구원의 이주영 팀장이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이어 2부 서비스 디자인 워크숍 시간에는 참석자들이 탐방객 입장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나눴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노잼도시'라는 대전의 현황을 진단하고 탐방객 입장에서 재밌고 유익한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8월 넷째 주에는 워크숍에서 도출된 다양한 의견을 바탕으로 참여기관과 전문가자문단이 모여 갑천유역 생태·문화 탐방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9월 중순에 시민자문단을 대상으로 시범 투어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정식 프로그램으로 대전이 궁금하고 대전을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정식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대전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우리 삶의 물줄기, 대전의 3대 하천. 강변을 따라 직접 거닐며 굽이 굽이에 스며있는 이야기를 만나보세요.